저승,
염라국과 불국토의 세계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세를 믿었습니다.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은 슬기로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속과 하늘 위 그리고 탄생과 죽음 이후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6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장례 풍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약 4만년 전의 청주 두루봉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의 화석 주변에서 국화 꽃가루가 확인되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며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는 의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신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국가가 만들어지고,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는 삼국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신앙의 대상은 점차 확장되었고 이에 따른 다양한 장례 풍습이 생겨났습니다.
불교 역시 이때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되었습니다.

불교의 전래 알아보기

믿음은 신앙이 되고,
예술이 되었다.

삼국은 차례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대부터 믿어왔던 민간신앙과 잘 융화된 불교는 전쟁으로 불안했던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불교가 대중에게 널리 퍼져 나갔고, 나라의 법과 제도가 체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해왔던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세계도 점차 체계적인 형태로 그려지고, 또 점점 복잡해졌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면 저승에서 심판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다시 환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깨우쳐 주기 위한 부처와 보살이 우리 주변에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가장 가깝고도 영향력이 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분청사기 이미지

목조여래좌상

목조여래좌상
목조보살좌상

<신과 함께> 속
신화의 세계를 만나다

명부계의 심판자, 시왕

신앙이 체계화되면서 옛사람들은 자신이 상상했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는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고, 그 아들이나 손자가 내려와 국가를 건설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부처가 사는 불국토와 힘든 중생을 도와주고 악귀를 물리치는 보살과 천왕을 그리며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가는 길, 황천강과 함께 그 너머에 있는 염라국과 판관들 그리고 저승사자들을 그리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그려진 세상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점차 방대해졌고, 다양해졌습니다. 이 놀라운 상상의 세계는 <신과 함께>와 같은 현대의 미디어로 되살아나 여전히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당시 그들의 상상력이 얼마나 섬세하고 구체적이었으며 폭이 넓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승 가는 길과 염라국

지옥의 여섯 번째 왕, 변성대왕

부처와 천지왕
그리고 서천국의 세계

옛날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하고, 또 그림이나 조각으로 남겨지기도 합니다.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이나 명부전에서 보는 <시왕도> 는 옛사람들이 그려낸 놀랍도록 정교한 세상의 일부를 보여줍니다.
시왕(十王)은 불교 경전인 《시왕경(十王經)》에서 언급되는 10명의 왕들로 명계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죄의 경중을 가린다고 합니다.
황천강을 건넌 영혼들은 그 열 명의 왕 앞에서 자신이 살았던 삶을 입체적으로 되돌아보면서 재판을 받습니다. 가끔 뉘우치면 죄가 감해지기도 하고, 판결에 따라 지옥에서 죗값을 치르기도 하는데 그림 속 지옥은 두려울 정도로 몹시 생생합니다.
시왕도 속 상상의 세계를 통해 선업을 쌓고 악업을 경계하라는 권선징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봅니다.

미디어아트 영상보기

고려,
벽란도의 찬란한 하루

고려시대의 수도 개경 옆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벽란도는 화문석, 나전칠기, 인삼, 종이와 같은 고려의 특산품을 찾아 많은 외국 상인들이 찾던 국제 항구였습니다.
고려 장인과 예술가들의 뛰어난 예술 감각과 세련된 취향으로 만들어진 제품은 세계의 상인들을 불러들일 정도로 놀라운 것들이었고, 그들은 이곳에서 얻은 고려의 상품과 문화를 서아시아 지역까지 전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려’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현재 세계인이 우리를 칭하는 'Korea'(코리아)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청자 유물 이미지

청자 들어오는 날

청자는 주로 강진에서 만들어져 배를 통해 벽란도로 옮겨졌습니다. 개경의 귀족들과 각국에서 온 상인들은 벽란도에 배가 들어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흉내낼 수 없는 10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비색”이라고 중국 사람들이 높이 칭송했던 고려 청자가 배안에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귀족들은 가까운 사람들과 차를 즐기는 것이 일상이었고,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는 청자 찻그릇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청자 찻그릇은 귀족들의 무덤 부장품으로까지 쓰여진 귀한 것이었습니다. 여인들은 화장품을 보관하기 위해 작은 크기의 청자를 주문했고, 글공부를 하는 귀족 자제는 청자 붓꽂이를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사찰에서도 청자로 만든 찻잔이나 향로 등을 최고로 쳤습니다.
게다가 중국과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질 좋은 고려청자를 구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었으니 당시 좋은 상감청자는 금보다도 귀한 대접을 받았을 만큼 훌륭한 보물이었습니다.

사실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10세기 무렵 강진의 한 가마에서 청자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중국에서 1,000여 년에 걸쳐 만들어 낸 청자를 200여 년 만에 만들어 낸 것인데 더 놀라운 것은 12세기에 이르러 고려가 만든 청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도자기가 된 것입니다.

상감청자의 제작기법

특히 고려청자가 지금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독창적인 제작기법인 상감기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감이란 물건의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 다른 색이나 다른 성질의 재료를 집어넣는 공예 기술인데, 고려 사람들이 금속 공예나 나전 칠기에 즐겨 사용했다고 합니다. 고려 장인들은 이 기술을 청자에 적용하면서 독창적이고 독특한 상감청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습득력과 응용력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손의 섬세함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빨리 배우고, 놀랍게 변화시키는 예술적, 창의적 감각을 자랑합니다.
우리 몸속에 여전히 고려 장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자기의 제작과정

도자기 영상 보러가기

상감청자 이미지

청자 상감 매화 대나무 연꽃무늬 매병

청자 상감 매화 대나무 연꽃무늬
청자 상감 국화무늬 주자
청자 상감 국화무늬 조롱박모양 주자
청자 상감 물가풍경무늬 매병
분청사기 이미지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장군

분청사기 조화 모란무늬 장군
분청사기 박지 모란 넝쿨무늬 매병
분청사기 귀얄무늬 접시

조선 도공의 하루,
분청사기

고려 말 어수선한 시기, 전국 각지로 흩어진 장인들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거친 흙으로 청자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만든 청자는 예전의 청자에 비해 색이 너무 어둡고 예쁘지 않았습니다.
도공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연구와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릇을 빚은 다음 표면에 흰 백토를 바르고, 다양하고 해학적인 무늬를 그려 넣은 독특한 문양의 분청사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약 150년간 나타났던 이 도자기는 청자에 하얀 분칠을 한 것 같다고 ‘분장회청사기’라 하였고, 이를 줄여 ‘분청사기’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청사기는 그 탄생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청자의 상감 기법을 이용한 ‘상감 분청사기’, 도장을 찍어 무늬를 만드는 ‘인화 분청사기’, 무늬를 긁거나 파서 표현한 ‘박지(조화) 분청사기’, 하얀 흙물을 붓으로 바르는 ‘귀얄 분청사기’ 등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도자기를 통째로 하얀 흙물에 담갔다 꺼낸 ‘덤벙 분청사기’와 철화 안료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철화 분청사기’도 등장했습니다.

백자 청화 매화 대나무무늬 각병과 서안 이미지

조선선비가 꿈꾸는 하루,
백자

우리는 조선시대를 상상하면 달빛 아래 독서에 열중하는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상상 속 선비의 방은 책이 가득 쌓여있는 서가와 담백한 가구들로 채워져 있고, 그 위로 하얀색 백자가 빛을 발하듯 올려져 있을 듯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상은 그런 담백함과 고고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이야기의 모습처럼 선비는 일상의 번잡함보다는 독서와 청빈의 삶에 푹 빠진 하루를 꿈꾸지 않았을까요?
단단하고 유려한 선, 깔끔한 흰 바탕 위에 새겨진 날렵하고 세련된 문양의 백자는 당시 선비의 이상이 담긴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담백함은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거칠지도 않은 우리만의 스타일이 되어 지금 한류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지고 있는 듯합니다. 백자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자기의 원조가 되었던 몇 백 년 전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매화 이미지

매화

난초 이미지

난초

국화 이미지

국화

대나무 이미지

대나무

조선백자와 사군자

검소함과 절제의 매력이 돋보이는 백자는 유교 사회를 추구했던 조선 왕실과 사대부의 취향에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백자를 궁궐의 공식 그릇인 어기로 사용하게 했고 왕실의 관심 아래 백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백자는 양반 가문과 일반 서민의 가정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선비들은 그 하얀 백자 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려 넣었습니다. 특히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사군자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이른 봄추위 속에서도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연약해 보이지만 진한 향기를 멀리까지 전하는 난초, 늦가을 서리에도 지지 않는 국화, 한겨울 추위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꿋꿋한 대나무의 기상은 선비들이 닮고 싶어 했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송암미술관 비디오 팝업 영역